그는 병원에서 마저 포기한 결핵 환자들을 위해 무등산 골짜기(지금의 신양파크 밑)에 송등원과 원효사 아래 공터에무등원이라는 움막 요양소를 마련해 준다.
최흥종 자신도무등원안에 복음당이란 토담집을 짓고 결핵 환자들과 함께한다.
기거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2021년 6월 기공해 지난해 12월 사용 승인을 받았다.
1956년 무등산 자락 아래 움막촌인 '무등원'을 모태로 한 소화자매원은 1967년 남구 봉선동에 자리 잡고 60여년간 나병·결핵환자, 지체장애인들을 돌봤다.
봉사를 하다 은퇴한 뒤 거처를 마련하지 못한 예수의소화수녀회 소속 수녀들을 위한 생활 공간이다.
1956년 결핵환자 재활시설 ‘무등원’으로 시작한 소화자매원은 1981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고 여성장애인을 위한 공간으로 거듭났다.
소화자매원 수녀들은 고 김준호(1924∼2010) 선생과 함께 1956년 3월 광주 무등산 자락에서 세운 결핵환자 재활시설 ‘무등원’을 세웠다.
무등원은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지금의 자리인 남구 봉선동으로 이전했고 1966년 ‘무등자활원’으로 이름을 바꿔 장애인도.
청년을 만나 천주교 성녀 소화 데레사(1873∼1897)의 숭고한 봉사와 사랑정신을 배우게 됐다.
김 선생은 당시 비인가 복지시설인무등원을 운영하며 소외계층을 돌보고 있었다.
수녀의 길을 걸으며 봉사활동을 하고자 했던 젊은 여성들이 모여들었다.
위원장(1945년)을 지내는 등 민족운동에 헌신했다.
해방 후에는 음성 나환자 자활을 위한 '호혜원'과 결핵 요양소인 '송등원' '무등원'을 설립하는 등 한센병·결핵 퇴치와 빈민 운동에 평생을 바쳤다.
1966년 선생의 장례는 사회장(葬)으로 치러졌다.
대한 확답을 얻어낸 일화는 유명하다.
음성 한센병환자 정착촌 '호혜원'을 설립해 함께 기거했고, 결핵환자 요양소인 '송등원'과 '무등원'을 각각 세웠다.
광주Y는 오방기념사업회와 오방장학회를 조직·운영하면서 오 목사의 헌신을 지금도 기리고 있다.
운동에도 앞장서 전남대 의대의 모태인 '전남의전'과 나병환자 자활을 위한 '호혜원(1955년)', 결핵요양소인 '송등원(1958년)', '무등원(1962년)'의 설립을 주도하는 등 서민들의 사회복지 향상에 삶을 바쳤다.
기념비가 들어서는 오방정은 본래 '석아정(石啞亭.
따르면 김모씨(26)는 5세이던 지난 1993년 11월 광주광역시 광천터미널에서 길을 잃고 배회하던 중 한 경찰관에게 발견돼 광주무등원보호시설로 보내졌다.
보호시설에 입소할 당시 김씨는 집 주소나 가족들의 이름, 연락처뿐만 아니라 자신이 어떤 이유로 외출했고.
또 그는 전남대 의대의 모태인 '전남의전'과 나환자 자활을 위해 '호혜원(1955년)', 결핵요양소인 '송등원(1958년)', '무등원(1962년)' 등의 설립을 주도해 한센병(나병)과 결핵퇴치, 빈민운동 등 사회복지 운동에 평생을 바쳤다.